일본 항복문서 조인식 이후에 벌어진 10가지 사건

히로히토 (Hirohito) 일본 천황은 1945 년 8 월 15 일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했다고 발표를 했고,2 차 세계 대전이 끝났다는 뉴스를들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은 기뻐했으며, 일부는 길고 고통스런 전쟁 이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걱정하였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일본이 항복한 사실을 거부했습니다. 이러한 각자의 사정들의 이유는 다음의 10가지 이유들 때문입니다.     


10. 만주에서의 대량학살

히로시마에 첫번째 원자 폭탄이 떨어지기 전부터 이미 일본인들은 공포에 빠져있었습니다.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던 만주는 당시 소련군이 공격하면서 이미 일부지역을 탈환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만주에는 백만명이 넘는 일본인과 군대가 있었고 그들은 전세가 기운후 자신들의 운명을 어느 누구보다 두려워했습니다.

이유는 일본인들이 만주에서 끔직한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이죠. 이곳은 일본의 731 부대가 있던곳이었습니다. 일본 과학자들이 살아있는 인간을 해부하고 화학무기로 고문을 하던 곳이었죠. 이곳의 끔찍함은 이미 많이들 알고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남겨진 일본인들중 일부는 싸웠고 일부는 도망갔지만 일부는 소련군에게 당할 보복이 두려워 자살을 하였습니다. 이곳에 같이 살고있던 일본인들의 부인은 자신의 자녀를 지키기 위해 중국인 가정에 데려가 자녀들을 돌보아달라고 부탁을 하기도 했죠. 하지만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거부를 하였고 자신들의 피난처를 찾을수없는 일본인들은 가족들을 이끌고 산으로가 다함께 할복을 합니다. 


9. 천황의 항복방송을 막으려 했던 장군

히로히토 는 일본이 항복하기 하루전 항복을 하겠다는 녹음을 합니다. 그리고 그를 따르던 장군들에게 동의하게 했죠. 그런다음 그는 녹음한것을 금고에 숨기고 아침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천황의 항복명령을 반대하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하타나카 겐지가 이끄는 고위급 장성 몇명이 전쟁을 계속하기로 한것이죠. 그들은 천황이 녹음한 자료를 훔쳐서 다음날 항복방송이 공중파를 타지 못하도록 작전을 짯습니다.

그날밤 하타나카는 부하들로 궁을 장악하여 궁을호위하던 군사들을 무장해제 시켰습니다. 모든출입구를 봉쇄하고 천황의 녹음자료를 찾으려 했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이후 경비대가 도착하며 하타나카와 부하들은 도망을 쳤습니다.


8. 하타나카의 할복

궁에서 도망친 하타나카는 또다른 계획을 세웁니다. 방송국에 침입해 항복발표가 방송되지 못하게 방송국에서 일하던 직원들을 설득하려 했던것이죠. 총으로 협박하고 설득도 해보았지만 끝내 설득에 실패한 하타나카는 결국 또 다시 도망을 칠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오전 11시 머리에 총을 쏴서 할복을 했습니다. 하타나카가 죽은지 1시간후 녹음된 항복방송은 일본의 모든 라디오를 통해 나오게 되었습니다.


7. 히로히토의 항복방송

히로히토는 방송에서 " 적군은 새롭고 잔인한 폭탄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우리가 계속 싸운다면 국가의 붕괴를 초래할뿐만 아니라 일본의 문명이 완전하게 멸종이 될것이다" 라며 항복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일본천황의 목소리를 처음듣는 일본국민들은 히로히토의 목소리가 상상했던거보다 거칠고 불분명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히로히토는 '항복하다' '패배하다' 라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6. 중국에 남은 수천명의 일본여자들

만주에서 남아있던 일본군과 일반인들중 일본여성 수만명이 있습니다. 그들은 중국의 농가로 보내지기도 하고 일부는 중국인과 결혼도 했습니다. 그렇게 남은 일본인들을 일본정부는 10년에 걸쳐 자국으로 데려오려 했지만, 수천명의 일본여성들은 그곳에 머물기로 마음을 먹었으며 일본으로 가는것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더이상 일본을 방문할수 있는 권한이 사라졌습니다.


5. 우가키마토메 의 마지막 카미카제

큐슈의 함대 사령관인 Matome Ugaki는 카미카제 공격으로 인해 이미 수백명의 병사를 잃었습니다. 그는 히로히토의 항복명령을 들었지만, 마지막으로 카미카제 공격을 하려 합니다. 그는 조종사가 아니었지만, 부하의 비행기 뒷좌석에 탓으며 타기전 마지막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렇게 9대의 카미카제 특공대는 미국의 함대로 돌격 했고, 함대에 접근하기도 전에 9대 전부 격추되어 바다로 추락했습니다.


4. 미국포로의 학살

히로히토의 항복이 선언 되었을때 16명의 미국공군은 일본수용소에서 자신들의 운명을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 수용소에서는 이미 살아 있는 미국포로들이 해부를 당하고 실험을 당하는등 수없이 죽고있던 중이었죠. 남아있던 16명의 미군포로들은 히로히토의 항복소식을 듣고 자신들은 살았다 라고 안도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곳에 있던 일본병사들은 그럴 생각이 없었던지 남아있던 16명의 미군포로를 태양 아래애서 칼로 잔인하게 학살하였습니다.


3. 사카에 오바의 게릴라군

당시 사이판에서 전투를 하던 사카에오바함장은 히로시마가 피폭당한 사진을 전달받고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이 소식을 믿지 않았고 여전히 일본이 이기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46명의 병사와 160명의 민간인들을 데리고 잠적했으며 3개월동안을 훈련시켜서 사이판에 있는 미군들을 공격할 준비를 하였습니다.  사라진 사카에오바를 추적하던 Umahachi Amo 소장과 어느 숲에서 만났으며 히로히토의 항복하라는 서면명령을 전달받게 됩니다. 그리고 미국부대로 행진하여 미군에게 자신의 칼을 넘겨 주었습니다.


2. 오노다 히로의 전쟁

필리핀에 있던 오노다 히로는 히로히토의 항복명령서를 전달 받았지만 이를 거부했습니다. 이후 그는 필리핀 정글에서 바나나와 코코넛을 먹으며 생활하게 됩니다. 그는 때때로 마을을 습격하였으며 그곳의 농부들은 오노다히로를 두려워 하게 됩니다. 몇년이 지난후 그의 소식을 들은 오노다의 직속상관 요시미타니구치가 필리핀으로 가서 오노다를 만나 항복명령을 다시 내립니다. 이후 오노다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에게 항복을 합니다. 이렇게 남아있던 마지막 일본군 병사가 항복함으로서 2차 세계대전은 끝나게 됩니다.


1. 히로시 야마자키의 속죄

일본에서 징집된 군사였던 히로시 야마사키는 1937년에 텐진에 도착했고 6개월동안 군을 따라다니며 동물을 치료하는 수의사로서 봉사를 했습니다.

히로시는 그와 함께한 일본군이 중국민간인에게 얼마나 잔인한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히로시는 자신이 본것들을 점점 더 역겨워 했습니다. 결정적으로 그는 일본군이 중국인의 아기를 목졸라 죽이는것을 보고 그날밤 일본군에서 도망쳤습니다.

히로시는 일본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하면서 동쪽으로 이동하였지만 끝내 지쳐서 쓰러졌고 한 중국인 가족이 그를 발견하고 집으로 데려가 보살피며 회복할수 있도록 도와주엇습니다. 그리고 히로시는 회복하였으며 산동에서 의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일본이 항복했을때 히로시는 집으로 갈수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거부했습니다. 자신의 남은생을 산동에 살면서 중국인들에게 속죄 하고 싶었다는군요.